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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고 싶은 글

한글 훈민정음은 한자 중국어의 발음기호였다

국보 제 70호 훈민정음 (출처: 위키백과)

 

우선 지금부터 제가 드리려는 말씀은 순전히 저의 개인의견이며 또한 저는 한글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저는 오히려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글 덕에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글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글에 대해서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부터 깨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 글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한글은 우수한 문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문자는 아닙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한글을 알파벳 보다 뛰어난 문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글은 알파벳에는 없는 받침이 존재합니다. 가로 결합만 하는 게 아니라 세로 결합까지 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받침도 한 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값, 겪, 밟 등 이중받침까지 존재합니다. 그리고 ㄲ,ㄸ,ㅉ,ㅃ 등 쌍으로 오는 자음도 있죠. 이것은 문자에만 국한된 문제점입니다. 한글을 한국어로 사용할 때에는 훨씬 더 많은 문제점이 발생합니다. 이 점은 조금 후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문장의 예를 가지고 한글과 알파벳을 각각 영어와 한국어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한글 한국어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를 매우 빨리 먹는다.’라는 문장을 알파벳으로 표현하면, 'naanun atsuimae ilzik ilaunaso mooangalul meiwoo ppali mauknunda’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뭔가 좀 발음이 어색하게 들릴 것 같네요. 그럼 알파벳 영어 'I wake up early in the morning and eat something very fast.'를 한글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아이 웨이크 업 어얼리 인 더 모닝 앤 잇 썸띵 베리 패스트.' 정도가 될 겁니다.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영어를 한글 발음으로 써 놓은 것이 한국어를 알파벳으로 써 놓은 것 보다는 더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원어민의 입장에서는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색한 발음으로 들릴 겁니다. 한글로는 영어의 L/R, F/P, B/V, J/Z, TH 등의 발음을 잘 표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발음은 어차피 양 쪽 모두에서 이상하게 들릴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들리는 것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떤 문자가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것이죠. 위에서 보다시피 알파벳은 문자를 가로로만 조합했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가로로 조합한 글자와 업,얼,인,닝,잇,썸,띵 등 세로로 조합한 글자도 있습니다. 또한 한글은 가로 조합의 경우에도 한 번만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모음과 자음까지 조합해야 합니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한글 (출처: Pixabay)

 

지금부터는 한국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래에 해외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어가 우수하다는 착각에 빠져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이는 한국어의 우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K-POP과 한국영화, 드라마 등이 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팬덤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늘어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한국어가 왜 어려운 언어인지 말씀드리자면, 일단 한국어는 주어가 없이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외국인들이 제일 헷갈려 하는 게 주어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동사가 맨 마지막에 옵니다. 이런 구조의 언어는 한국어와 일본어등 극소수에 불과하죠. 그리고 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한국어에는 다른 언어에 없는 받침이라는 게 있습니다. 받침을 조합하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굉장히 생소할 뿐더러 이중받침까지 완벽하게 외우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더구나 비슷한 발음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ㄱ,ㄸ,ㅌ - ㅂ,ㅍ,ㅃ - ㅈ,ㅉ,ㅊ - ㅈ,ㅉ,ㅊ 등은 외국인들에게는 거의 똑같이 들린다고 합니다. 모음의 발음은 더 심해서 ㅓ,ㅗ는 십년 이상 한국어를 공부한 사람도 구분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애교수준입니다. 외국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조사입니다. 외국어에는 아예 없는 것이죠. 그리고 조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때 그 때 다 다릅니다. "가, 에, 을, 를, 는, 은, 이" 등이죠. 한국어 잘 한다는 외국인들도 는,이,가를 구분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여기에 더해서 동음이의어도 많고, 존칭과 경어까지 다 외우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 솔직히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영어학원에 다닐 때를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학위를 따려고 오는 외국 학생들이 더러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말을 거의 못했습니다. 몇 년이나 지나서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도 인사말 정도의 간단한 대화 밖에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반면, 한국인들은 영어 스피킹학원을 다니면 6개월 이내에 초급 이상의 대화가 가능하며, 몇 년 안에 중급 정도 되는 회화를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즉, 한국어가 타 언어에 비해 엄청나게 배우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고정관념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한글이 왜 중국어의 발음기호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1443년(세종 25년)에 만들어졌고, 1446년(세종 28년)에 공식적으로 반포되었습니다. 훈민정음이란, ‘백성들에게 바르게 발음하도록 가르친다’라는 뜻입니다. 즉, 발음을 교육하는 책인 것입니다. 만약 글자를 창제하는 의미였다면 훈민정자(訓民正字) 또는 훈민정문(訓民正文)이 되어야 했을 겁니다. 훈민정음에서의 정음(正音) 즉, 올바른 발음이란 중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종은 중국어를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랏말싸미 중국에달아’라는 말도 우리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뜻이며, ‘문자와로 서르사맛디아니할쎄’라는 말도 문자만으로는 서로 통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문자는 같지만 발음이 달라서 한국어로는 제대로 된 중국어 발음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모든 한글 문자는 혀와 목구멍의 발음을 기호로 표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의 어진이 없어서 이성계 어진으로 대체(출처: 위키백과)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2월 27일 무오 1번째 기사를 보면, 중국 천자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천자(天子)의 권렴(眷念)하심이 너무나 깊으시어 저의 주문(奏聞)한 것을 다 들어 주시었고, 슬기로운 은혜가 넓고 무겁게 내리시니 조심과 두려움이 더욱 깊습니다. 사신(使臣)이 이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가니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저의 나라가 아득하게 황취(荒陬)에 놓여 있어 일찍이 풍화(風化)에 향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옵고 황유(皇猷)를 흠앙(欽仰)하기를 더욱 삼가하고자 하나, 매양 명령을 전해 올 때는 반드시 역관(譯官)으로 인하여 뜻을 통하옵고도 그 때마다 사수(師授)함이 밝지 못하여 어음(語音)이 정확지 못하게 되었나이다. 다행으로 이 변방 오랑캐의 부로(俘虜)는 본디 중국의 백성이므로 감히 마음대로 머무르게 할 수 없어 이를 번거롭게 진청(陳請)하였더니, 어찌 성상[聖神]의 어여삐 여기시고 살펴주심을 생각하였으리오마는, 특별히 포장(褒奬)하시고 윤허[允兪]하여 주시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저의 의(義)를 흠모하는 정성을 굽어 생각하시고 더욱 동문(同文)의 덕화를 넓히 함이니, 이같은 천한 무리로 하여금 특별하신 사정(私情)을 입게 하시었습니다. 신은 삼가 중국 법으로 이적(夷狄)을 변하게 하여 성교(聲敎)를 드높이려 하오니, 원컨대, 적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며 항상 수복 강녕[壽康]을 빌까 합니다."

위의 서신 구절에서 우리는 세종이 중국에 얼마나 사대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만, 그와 더불어 그는 역관의 발음이 신통치 않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조선은 중국의 한자를 문자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의 말(한국어)은 한자만 사용해서는 중국말의 성조를 제대로 발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백성들의 의사소통을 편하게 하고자 함이었다고 가르칩니다만, 글자가 없다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아니죠. 우리나라는 196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습니다. 그들은 글을 전혀 읽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죠.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어린 백성’이라는 말도 글자 그대로 ‘어리석다’라는 뜻입니다. 안타깝고 불쌍해서 어리석다고 한 것이 아니라 무식해서 어리석은 백성들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어 발음을 개판으로 하는 역관(통역가)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철저한 사대주의자였던 세종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중국 천자에게 충성하지 않는 나라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 큰 고민이었을 겁니다.

오늘날 세종은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뛰어난 왕이라고 칭송받고 있는 인물입니다만, 저는 세종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종은 노비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법을 만든 인물이며 평생을 중국에 굴종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신하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을지 모르나 백성들을 위했던 왕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기록은 글자로 남습니다. 글자는 양반들이 기록하는 것이죠. 실록에 백성들의 민심이 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양반 기득권의 영웅이 바로 세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켜 준 세종을 향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박정희 (출처: 위키백과)

 

또한 세종이 어느 순간 위인으로 등극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시기였습니다. 저는 개발독재 시대의 박정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을 겁니다. 박정희는 과(過) 보다는 공(功)이 훨씬 더  큰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를 미화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한국을 성리학 사회로 되 돌이킨 큰 죄가 있습니다. 그는 이황, 이이, 세종, 이순신 등 성리학자들과 조선시대 인물들을 지폐에 그려 넣었으며 광화문 광장과 큰 길 곳곳에 그들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한 이승만 보다  한학을 공부한 김구를 더 띄워 주었습니다. 때문에 박정희 이후로 또다시 조선시대의 악마적 그림자가 한국의 땅에 다시 드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세종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떠들어대는 학자들 중에 상당수는 이런 식으로 박정희 시대의 세종 띄우기에 세뇌된 생각과 국뽕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라는 KBS 역사스페셜을 보면, 신숙주와 성삼문 등이 요동에 귀양을 와 있던 중국의 언어학자(한림학사) 황찬을 만나서 음운을 물었다고 나옵니다. 무려 13차례나 만났다고 합니다. 그동안 한글 연구가들은 세종이 한글을 만들기 위해서 신숙주를 요동에 보냈다고 알고 있었지만, KBS에서는 이는 틀린 사실이라고 하면서 신숙주가 요동에 간 것은 한글 때문이 아니라 한자음, 즉, 중국어 발음 때문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은 신숙주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훈민정음과 중국어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KBS는 여기서 틀린 말을 하고 있는데,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이 1447년 1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숙주가 최초로 요동에 간 것은 1445년 봄이었습니다. KBS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영 다큐 방송에서 이렇게 틀린 내용을 방송한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이때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유배되었는데 을축년(세종 27년:1445) 봄에 공(신숙주)에게 북경에 가는 사신을  따라서 요동에 가서 황찬을 만나 질문하게 했다. 공이 언자(諺字:훈민정음)로 중국말을 번역하고(諺字<7FFB>華音) 질문을 쉽게 풀이해서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황찬이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요동에 갔다 온 것이 무릇 13번이다.(보한재집, 부록 묘지)"

위 글에서 보다시피 훈민정음이 반포된 1446년(세종 28년) 이전에 이미 신숙주가 황찬을 만났던 것입니다. KBS가 왜 틀린 말을 했을까요? 아마도 중국어 발음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만났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때도 이미 신숙주가 한글로 중국어 발음을 해석하고 있던 것으로 봐서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중국어 발음을  한글로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신숙주가 굳이 황찬에게 훈민정음으로 중국어를 번역하는 것을 보여준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보물 제 613호 신숙주 초상화(출처: 위키백과)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이 1443년(세종 25년)이기 때문에 집현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성삼문과 신숙주는 한글창제에 기여한 것이 전혀 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숙주가 집현전 부수찬이 된 시기가 1441년이고, 성삼문은 그 보다 더 일찍 집현전에 들어왔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됩니다.

당시에 신하들이 한글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중국어를 하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었습니다. 한국도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영어를 잘 하면 출세에 굉장한 프리미엄이 붙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대우를 더 받습니다. 그러니 조선시대 초기에 일부 양반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문맹이었던 시기에 쉽게 중국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었겠습니까. 기득권 양반들에게는 한글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폭탄과도  같은 것이라고 느꼈을 겁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지위가 낮았던 양반들과 적대 세력이었던 양반들이 중국과 교통하면서 중국의 신임을 얻게 되면 자신들의 지위에 도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를 쓰고 반대를 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죠. 당시에 나이든 원로 학자들은 적극 반대했고, 젊은 학자들은 반대했다는 소리가 없다고 나옵니다만, 젊은 학자들도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불안해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글창제에 자신들의 이름을 빼고 전하(세종)가 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젊은 학자들도 자기들의 이름이 적히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글창제 과정을 보면 세종은 왕자들과 공주들, 즉, 자기 자식들을 투입시켜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선뜻 나서는 자가 없으니 이렇게 왕자들까지 동원해서 신하들을 압박한 것입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글월에 학자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위와 같은 정황이 있는 것입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이런 정황을 무시하고 학자들이 제작자로 등재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꾸 세종 독자적인 창제라고 말하는데, 세종의 명령으로 중국의 언어학자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의 명령으로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을 만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만 봐도 젊은 학자들이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신숙주가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무려 일 년 전에 한글을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해설서를 만드는 게 보통일입니까? 한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으면 절대로 해설서를 만들 수 없습니다.

역사스페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신하들이 세종에게 '가볍게 옛사람들의 운서에 터무니없는 언문을 붙이면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세종이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이냐?'라고 되묻습니다. 즉, 중국어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이 이토록 훈민정음에 집착했을까요? 그것은 세종이 철저한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세종은 거의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는 기득권 양반층을 대변하는 정치를 했습니다만, 병적으로 중국에 사대했던 중국의 충신이었던 세종의 입장에서 중국어를 똑바로 발음해야 한다는 명분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세종이 얼마나 병적인 사대주의자였는지는 아래 세종실록의 기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명 황제의 사신이)경복궁에 당도하자, 상왕(태종 이방원)은 궁문 밖에서 고명을 영접하고, 사신은 절·고를 받들고 근정전에 당도하니, 상왕은 전정(殿庭)에서 절·고에 먼저 절을 하고 악차로 들어갔다. 임금(세종 이도)은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네 번 절한 후 전상으로 올라오니, 사신은 친히 고명을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받고서 뜰에 내려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네 번 절하고 악차로 들어가 면복을 입고 나와, 여러 신하와 더불어 멀리 사은하며 네 번 절하고 향을 피우며, 또 네 번 절하고 만세를 부르며 춤추고 발구르며, 네 번 절하고 악차에 들어가 면복을 벗었다. 사신은 절(節)을 받들고 나가니, 임금과 상왕은 전정에 나가 공경히 전송하고, 여러 신하는 절을 인도하며 태평관(太平館)에 당도하여, 절을 북루(北樓) 위에 안치하였다. 상왕은 태평관에 와서 사신과 더불어 사례(私禮)를 행하고 수강궁으로 돌아갔다. 임금은 사례를 행하고 나와서 악차에 들러, 앉아서 여러 신하와 예를 행하였다. 예식이 끝나니, 한확(韓確)은 악차 앞에 와서 네 번 절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19일 갑자 2번째기사』

일개 사신을 중국의 황제 대하듯 했던 게 조선의 왕 세종이었습니다. 설사 중국의 황제라고 해도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굴욕적인 행위가 아닙니까?

신하들이 세종의 사대가 지나침을 아뢰자, 세종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백성들이 고통받는)민간의 폐해를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대의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는 가벼운 일이나 사대를 성실히 하지 않는 것은 무거운 일이다” 『세종실록 33권, 세종 8년 9월 29일 기미 1번째기사』

세종은 백성들의 고통 보다 중국에 사대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한국의 국뽕 학자들은 집현전의 원로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반대한 이유를 두고, 조선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항하는 일이고 중국 황제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합니다만, 이는 억측입니다. 위의 여러 기록에서 보다시피 세종은 그 누구보다도 중국에 사대했던 충신이었습니다. 신하들 보다 더 중국에 충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당시 청매, 즉, 날개가 파란 진귀한 매(해동청)가 있었는데, 굉장히 희귀한 보물 새였다고 합니다. 이 새가 발견되자 세종은 중국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 새를 잡아서 중국 황제에 바칩니다. 그 이후에 또 한 마리가 잡혔는데, 신하들이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해도 세종은 기어코 또 중국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이렇게 중국에 사대했던 세종이 중국 황제를 거역하고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고요? 너무 억지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종은 한글을 반대했던 집현전 학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양반을 우대하고 양반의 명분을 중시했던 세종이 이렇게 단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 황제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는 더 큰 명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스페셜은 세종이 당시의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을 두고 충격을 받아 삼강행실도를 그려서 백성들을 교육시켰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삼강행실도의 그림만 보고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에 세종이  글자를 발명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만, 단지 그 하나만으로 글자를 발명했다고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은 상강행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례(周禮)》를 보니, ‘외사(外史)(벼슬이름)는 책 이름을 사방에 펴 알리는 일을 주관하여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글자를 알게 하고 책을 능히 읽을 수 있게 한다.’ 하였으므로, 이제 이것을 만들어 서울과 외방에 힘써 회유(誨諭)의 방술[術]을 다하노라. 서울의 한성부 오부(漢城府五部)와 외방의 감사(監司)·수령(守令)은 널리 학식이 있는 자를 구하여 두터이 장려를 더하도록 하되, 귀천(貴賤)을 말할 것 없이 항상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부녀까지도 친속(親屬)으로 하여금 정성껏 가르쳐 분명히 깨달아 모두 다 알도록 하고,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하고 저녁에 진취하여, 그 천성의 본연(本然)을 감발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게 되면, 아들된 자는 효도를 다할 것을 생각하고, 신하된 자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며, 남편된 자와 아내된 자도 모두 자기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사람들은 의리를 알고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진작(振作)할 것이니, 교화(敎化)가 행하여지고 풍속이 아름다와져서 더욱 지치(至治)의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매, 오직 너희 예조(禮曹)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아 중외(中外)에 효유하라." -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4월 27일 갑술 2번째기사

즉, 고을 양반들이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쳐 깨닫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백성을 위해서 글자를 발명하겠다는 말도  없고, 백성들이 글자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없습니다. 세종의 최종 솔루션은 양반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한글을 누가 만들었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글이 중국어의 발음기호라는 것이죠. 그리고 한글이 세종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어떤 문자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그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것까지 다루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 또한 부수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주제는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이 중국어의 발음을 잘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한글 각 문자는 사람이 발음하는 혀의 모양을 본 떠서 만들었다고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발음기호가 틀림없는 것입니다.

세종은 1448년(세종 30년)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령하여 '동국정운(東國正韻)'을 발간하도록 했는데, 이는 중국의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참고하여 한글로 표준 한자음을 표기한 책입니다. 즉, 세종은 애초부터 홍무정운을 참고하여 중국어 발음기호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고 그 결과물이 한글이었습니다. 그것을 드디어 통일 중국의 표준 발음책에 적용을 한 것입니다.

이제 세종이 요동에 신숙주와 성삼문 등을 보낸 것은 중국어의 발음기호표인 한글을 제대로 만들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임이 확실해졌습니다. 과연 신숙주가 왕의 명령도 없이 자기 독단적으로 요동에 13차례나 방문해서 중국어 발음에 대해 상의하러 갔을까요? 이 일은 오히려 세종이 중국어 발음기호를 만들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한글이 왜 중국어 발음기호인지 증거 영상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WIQiwjZRbA

 

위 영상을 보면, 훈민정음만 알고 있으면 중국어 발음을 너무도 쉽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참고로 중국어 발음기호인 한글을 한국어에 맞게 체계화하고 보급시킨 건 일제시대였습니다. 그 때 여러 개의 한글 문자가 삭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문자들이 중국어를 발음할 때만 필요한 문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어에는 필요가 없는 문자들이었죠. 그래서 그것들을 삭제하고 오늘날의 자음과 모음이 확립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벌써부터 악플이 달릴 것이 염려되네요.ㅎㅎ. 이 글은 한글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역사의 해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 송시열과 윤휴의 논쟁을기억하시나요? 윤휴는 공자와 맹자의 글을 자신의 소신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오로지 성리학(주자학 또는 예학이라고도 함)만 허용되던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윤휴는 송시열에 의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통제한 탓에 중국과 일본 등에서는 성리학을 넘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학문으로 발전된 반면, 조선만 유일하게 교조적인 성리학 암흑기에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역사기록에 성군으로 칭송을 받는 대표적인 왕이 세종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반 백성들이 세종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위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백성들은 글을 모릅니다. 모든 기록은 글자로 남죠. 결국 세종에 대해서 기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양반들이었습니다. 세종은 양반 기득권을 보호했던 대표적인 왕이었습니다. 반면 양반 기득권을 무너뜨리려던 왕들은 전부 폭군으로 기록되었죠. 이런 정황을 볼 때 저는 세종을 좋은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조선시대가 노비국가가 되도록 만든 불명예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글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는 한국의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점이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점을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한국어 특유의 존댓말입니다. 이게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경직되게 만들고 서열문화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다툼은 반말로 인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의 언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단 1살 차이만 나도 바로 서열을 형성합니다. 서열이 정해지면 자유롭고 비판적인 의견을 공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경직성은 창의력의 결여로 이어집니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국가들이 근대화와 현대화에 크게 기여한 이유는 그들의 언어가 평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로 인한 서열의 구분이 생기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어가 세계적인 공용어로 통용된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 신자들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미국이고,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존해주신 킹제임스 성경이 영어로 만들어져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이 각 나라에서 쉽게 번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