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오늘날의 방언은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강림 일러스트(출처: Pixabay)

 

저는 오늘날 성령님의 은사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제목만 보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옛날의 방언'이 아니라 '오늘날의 방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방언에 대해서만큼은 과거에는 은사였으나 지금은 아니라는 뜻으로 제목을 적은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 시대인 초기 교회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믿음이 없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세 이후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방언은 다른 나라 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만 가지고는 다른 나라 사람들 및 다른 지역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14장만을 유독 강조합니다만, 그 전에 고린도전서12장부터 봐야 합니다. 방언은 초기 교회에 주어진 여러 가지의 은사들 중에 하나였을 뿐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주어진 것은 그것으로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함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에 의해 지혜의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에 의해 지식의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에 의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에 의해 병 고치는 선물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기적들 행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대언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타 언어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타 언어들 통역함이 주어졌으나 같은 그 한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사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나누어 주시느니라.(고린도전서12장7절~11절)

 

그런데 이러한 은사들 중에 타 언어들은 가장 낮은 은사였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 사람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대언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선물들과 돕는 것들과 다스리는 것들과 여러 가지 타 언어들이니라.(고린도전서12장28절)

 

또한 아래 성경 말씀을 보면 이러한 은사들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모두가 방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모두 사도이겠느냐? 모두 대언자이겠느냐? 모두 교사이겠느냐? 모두 기적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모두 병 고치는 선물들을 가지겠느냐? 모두 타 언어들로 말하겠느냐? 모두 통역하겠느냐? 오히려 가장 좋은 선물들을 간절히 사모하라. 그럼에도 내가 너희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이노라.(고린도전서12장29절~31절)

 

또한 방언과 같은 은사들을 사모하는 것 보다 오히려 가장 좋은 선물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좋은 선물들이란, 마태복음7장11절과 누가복음11장13절, 그리고 야고보서1장17절에 나오는 좋은 선물들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령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오늘날에도 방언을 해야 한다면, 어째서 다른 은사들은 안 하는 겁니까? 통역하는 은사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통역은 안 합니까? 병 고침의 은사도 있고 기적의 은사도 있다 하지 않습니까?

 

마가복음에 방언과 기적의 은사가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이 따르리니 곧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내쫓으며 새 언어들로 말하며 뱀들을 집어 올리며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들에게 안수하면 그 사람들이 나으리라, 하시더라.(마가복음16장17절~18절)

 

오늘날에 뱀을 들어 올리고 독극물을 마시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서의 뱀은 당연히 독사를 뜻하는 겁니다. 뱀을 들어 올리면 뱀에 물리고 독극물을 마시면 죽기 때문에 그런 은사는 절대 흉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을 고친다는 것도 다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병이 나으면 자신의 은사 능력 때문이고, 병이 낫지 않으면 환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이겠죠. 만약 병 고치는 은사가 실제로 있다면, 지금 당장 암 병동에 가서 모든 암 환자들을 다 고쳐내야 합니다. 위의 성경말씀에도 믿는 병든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병든 사람들이라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지 않던 사람도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타 언어로 말하는 것을 뜻하며, 성경이 완전히 기록되지 않았던 시절 하나님의 말씀을 타 언어를 사용하는 불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한 방편으로 잠시 동안만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으며, 타 언어를 전혀 몰랐던 성도들이 타 언어를 사용해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사람이 듣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하며, 통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람이 해석할 수 없는 방언은 마귀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소위 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크리스천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은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은사이고 구원의 증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방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도 방언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스스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사람이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거나 믿고 있다면 트랜스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누구나 그런 상태가 되면 방언과 같은 말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트랜스 상태라는 것은 아래와 같습니다.

 

트랜스(trance): [명사] [심리] 정상적인 의식이 아닌 상태. 최면 상태나 히스테리 상태에서 나타나는데, 외계와 접촉을 끊고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가 특수한 희열에 잠기는 것을 이른다.

 

즉, 트랜스 상태에 빠져 들어서 자아도취적 발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일종의 무속적인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의 독특한 습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터져 나오는 발성은 전혀 해석되지 않는 쏼라쏼라 랄랄랄라 하는 괴상망측한 소리에 불과하며 어쩌면 마귀가 하나님을 저주하는 소리이거나 혹은 마귀를 찬양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트랜스 상태가 되면 인간의 몸에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는 구원 받은 우리 크리스천 형제들의 안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서 떠나는 일은 없습니다(요한복음 14장16절~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은 여전히 죄덩어리의 몸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그 몸을 마귀가 컨트롤할 수 있게 되는 때가 바로 트랜스 상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방언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완고하게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방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특히 "사랑을 따르고 영적 선물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너희는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라. 알지 못하는 타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이는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기 때문이니라.(고린도전서 14장 1절~2절)" 는 말씀입니다.

 

위의 구절은 타 언어인지 아닌지 조금 모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은사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이런 특이한 구절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표현되고 있는 방언은 타 언어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위의 고린도전서 14장 1절~2절 딱 하나만 끄집어내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성경에는 구원이 영원하다는 구절들이 99퍼센트이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모호한 구절이 1퍼센트 정도인데, 구원상실을 믿는 사람들은 1퍼센트로 99퍼센트를 뒤집으려 합니다.

 

어떤 한 구절이 이해가 안 될 경우에는 성경의 다수 구절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는 것임에도 그들은 굳이 저 한 구절을 가지고 쏼라쏼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4장 1절에도 대언을 사모하라고 나와 있지 방언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또한 2절의 하나님께 말하는 신비, 즉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한다는 뜻은 성령님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 언어로 말하는 사람 자신의 영(소문자 spirit으로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신비가 좋은 의미이 신비인지 나쁜 의미의 신비인지는 저 구절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을 사모하라는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방언을 연습하라는 구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고린도전서14장19절)

 

위의 성경구절에서 보다시피 방언으로 만 마디를 하는 것 보다 사람들이 알아듣는 말로 다섯 마디를 하는 게 더 낫다고 나와 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라 믿는 것은 대단히 큰 착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신다고 수차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천상의 존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루시퍼가 속으로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방언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말은 전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한국말로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알아들으십니다. 다른 사람이 내 기도를 들을까봐 염려가 된다면 그냥 속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따라서 방언은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방언(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린도전서14장22절)

 

위의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내용 전체를 핵심 요약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말이 통하지 않는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뜻이죠. 교회에서 하나님에게 방언하는 사람들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믿음이 없는 이방인인가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 일러스트(출처: Pixabay)

 

오늘날 방언논쟁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성경 문제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타 언어라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만, 개역개정 등에서는 타 언어라는 말 대신에 방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원문에는 unknown tongue 즉, 알지 못하는 언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tongue는 그리스어 glossa를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글로싸(glossa)는 사람의 입 안에 있는 혀,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 사투리, 방언(이해할 수 없는 말) 등으로 쓰이고 있는 그리스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tungue가 어떤 뜻으로 쓰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에서 glossa가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글로싸(glossa)는 사도행전에 3번 나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이 일이 널리 퍼지매 그 무리가 함께 와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말로 말하는 것을 각 사람이 들으므로 당황해하더라.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며 서로 이르되,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느냐?(사도행전 2장 6절~8절)" 오순절 날에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사람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갈릴리 사람들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언어로 말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의 tongue, 즉 글로싸는 타 언어임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으로 사도행전 10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이더라. 이에 베드로가 응답하되(사도행전 10장46절)" 여기에는 이방인 고넬료가 구원을 받는 스토리가 담겨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이방인들이 타 언어로 말을 하고 있으며 베드로는 그들이 타 언어로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들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도 타 언어가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19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 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사도행전 19장6절)"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그들이 타 언어로 말하고 대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쏼라쏼라와 같은 방언이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타 언어로 쓰였음이 분명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tongue는 모두 타 언어임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tongue가 왜 타 언어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했고,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누가와 바울은 친구였고 선교여행을 하면서 동행했던 사이였습니다. 사도행전은 고린도전서 보다 5년 늦게 기록되었습니다만, 실제로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고린도전서 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이 먼저라는 것을 반드시 상기해야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3번 걸쳐서 나오는 tongue, 즉 글로싸(glossa)는 모두 타 언어임이 확실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타 언어 은사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tongue 은사가 타 언어로 쓰이고 있음을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면서 명시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 tongue 은사가 이미 타 언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타 언어라는 상황의 해설이 없이 그냥 기록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타 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타 언어 은사는 예를 들어, 히브리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한국인이 있을 때, 히브리 사람들이 한국말로 한국인들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고 타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린도전서 14장 39절)" 라는 말씀도 자기 나라 말이 아니라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말씀이라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경이 전 세계에 보급된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고 봐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방언은 알려진 언어로 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래 링크한 웹페이지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XXI)의 3번째 항목 참조)

 

https://thewestminsterstandard.org/the-westminster-confession/

 

The Westminster Confession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6-1647) with Scripture Proofs

thewestminsterstandard.org

 

또한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방언은 남자들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남자(man)가 알지 못하는 타 언어로 말하거든 두 남자나 많아야 세 남자가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남자가 없으면 그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4장27절~28절)

 

위의 말씀에 따르면 방언은 최대 남자 3명으로 제한되며, 통역이 없으면 방언 자체를 하지 말라고 되어 있으며, 만약 통역 없이 말하려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기 집에서 혼자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방언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들에서 잠잠히 있을지니 말하는 것(speak)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 만일 그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speak)은 수치스런 일이니라(고린도전서 14장34절~35절)

 

위의 성경구절을 보면 여자들은 교회 내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말은 NIV나 KJV 모두 동일하게 speak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피크(speak)는 일반적인 '말하다'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영어를 조금 공부해 보신 분들을 아시겠습니다만, say, speak, tell, talk, mention, ask 등은 전부 '말하다'라는 뜻입니다만 의미는 각각 다릅니다. speak는 '말 자체를 할 줄 아는 능력', '언어를 말하는 능력' 등을 뜻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speak는 방언을 뜻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4장의 전체적인 소재도 방언에 대한 것입니다. 14장2절, 4절, 5절, 9절, 11절, 13절, 18절, 19절, 21절, 23절, 27절, 28절, 29절, 30절 등에 쓰인 speak는 모두 방언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만약 14장34절에 쓰인 speak가 방언이 아니라면 문장 자체가 생뚱맞은 문장이 됩니다. 앞부분의 모든 구절에서 speak가 방언을 의미했는데, 뒷부분의 speak가 갑자기 일반적인 말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인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죠.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뒷부분의 speak도 방언이라야 자연스러운 연결이 됩니다.

 

위의 성경구절에 따르면 방언은 남자들에게만 부여된 권한이며 여자들에게는 speak, 즉 방언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에 집착하는 이유는 글의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모든 은사들 중에서 방언이 가장 흉내 내기 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병 고침의 은사도 있고 기적의 은사도 있다고 나옵니다. 병 고침과 기적은 흉내 내기 쉽지 않죠. 그러나 방언은 쏼라쏼라 랄랄랄라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비교적 쉽습니다. 또한 트랜스 상태가 되면 자신이 놀랄 정도로 실제로 어떤 힘에 의해서 방언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은사를 받았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 힘이 마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회나 부흥회에서 방언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방언을 믿는 여러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기타소리 드럼소리 등 쿵쿵거리는 비트와 리듬이 극도의 흥분상태를 만들고 마음이 격앙된 상태에서 마치 무당이 신 내림을 받을 때의 트랜스 상태와 비슷한 환각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되는 것이겠죠. 은사주의자들만 방언을 하는 게 아닙니다. 무당도 방언을 하고 불교의 승려들도 방언을 합니다. 종교적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면 이런 식의 방언은 언제든지 어느 누구에게나 터져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온전히 기록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타 언어로 말하는 은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이 방언에 집착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언을 하지 못하면 혹시 내가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또는 자신이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라고 하는 착각에 빠져서 자신의 신앙심을 자랑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은 성경의 진리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마귀의 책략이라고 생각하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오히려 하나님을 비방하는 마귀의 소리이거나 혹은 사탄 마귀를 찬양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30절을 보면 성도들 모두가 방언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만약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이 방언을 해야 한다면, 어째서 성령침례를 받은 예수님은 방언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어째서 고린도전서 보다 후대에 기록된 로마서나 에베소서 등 대부분의 신약성경에는 방언의 기록이 없을까요? 어째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했던 훌륭한 분들과 수많은 목사님들은 방언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마틴 루터, 칼빈, 마틴 로이드 존스, 찰스 스펄전, D.L. 무디 등이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나요?

 

고린도전서 13장8절 말씀에,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 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방언이 그친다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그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린도전서 14장도 전체적으로는 방언을 남발하지 말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고린도전서 14장 19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모두 타 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고린도전서 14장23절)"

 

아래는 정동수 목사님께서 방언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모국어로 진실하고 소중한 생각과 의미를 담아서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주변에서 방언을 해야 한다고 하면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특히 배우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는 더욱 배격하기 바란다. 만일 교회가 강요한다면 당장 그 교회를 떠나길 바란다. 방언 없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훌륭한 교회들도 많이 있다. 방언기도는 마약과도 같다. 한 번 맛을 들리면 신비한 경험을 했다는 자부심에 더욱 갈망하게 되고 중독되고 습관화가 된다. 또한 방언기도는 영적 성장과도 전혀 관계가 없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방해할 뿐이다.

 

 

 

https://smallstars7.tistory.com/49

 

성경대로 올바르게 제대로 방언하는 방법 (고린도전서 14장 방언방법)

오늘은 성경 고린도전서14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언방법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개역개정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 그리고 NIV 영어 성경, KJV 영어 성경 등, 네 가지로 살펴보겠습니

smallstars7.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