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글쓰기의 간편성을 위해서 지금부터 구원상실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상실파'로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영원파'로 지칭하겠습니다.
구원상실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을 믿는 사람들이 방탕한 삶을 살면서 구원을 잃게 되어 지옥에 가게 될까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반면,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구원상실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될까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움과 안타까움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양 쪽의 안타까움에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상실파는 구원영원파가 혹시나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나쁜 행위를 해서 구원을 잃게 되어 지옥에 떨어질까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구원영원파는 구원상실파 모두가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큰 차이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구원영원파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상실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상실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영원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보혈대속으로 구원을 영원토록 안전하게 하셨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고 믿는 것은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상실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처음에는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었다가 나중에 의심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적 진리를 말씀드리기 전에 수학적인 논리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특히 아직 성경교리를 잘 모르는 초보자분들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딱 봐도 구원영원파가 되는 게 훨씬 안전하게 보이지 않나요? 구원상실파의 입장에서도 구원영원파 모두가 지옥에 간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들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살면 구원을 잃지 않고 천국에 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영원파 입장에서 볼 때 구원상실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옥에 가게 된다고 보고 있어요. 따라서 뭐가 뭔지 헷갈리는 초보자분들은 구원영원파가 되는 게 훨씬 유리합니다.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중차대한 문제인데 무조건 지옥에 갈 수도 있는 구원상실파가 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도박입니까? 그 보다는 구원영원파가 되는 게 훨씬 낫죠. 만약 구원상실파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구원영원파로 살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선하게 살면 결국 천국에 가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학적 논리는 그냥 웃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해요. 그냥 약간의 농담이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왜 구원영원파가 맞는지 성경적 진리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에 관해 말씀하실 때에는 거의 대부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의 성경구절에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는 앞뒤 문맥을 살펴보고 원어 성경도 보고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비슷한 말씀이 있는지 비교해서 검토해 보면 구원상실을 뜻하는 말씀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헷갈리는 부분이 나오면 반드시 다수의 명백한 말씀들을 따라야 합니다. 99퍼센트가 영원한 구원을 말하고 1퍼센트가 모호하게 말하고 있다면 99퍼센트를 따라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1퍼센트로 99퍼센트를 뒤집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김영현 전도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며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들은 빌립보서2장12절 말씀과 고린도전서9장27절 말씀입니다. 우선 이 말씀들을 살펴본 후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자세히 나누고자 합니다.
빌립보서2장12절은 결국 성경사본의 문제입니다.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역본 성경들은 천주교 소수사본을 근거로 번역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성경을 보느냐에 따라서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저는 다수사본(TR)을 근거로 번역된 킹제임스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사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래 제가 포스팅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smallstars7.tistory.com/68
천주교의 실체 - 04편, 카톨릭은 왜 성경을 삭제하고 변개했는가?
성경 변개의 문제는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세세한 내용을 전부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제가 그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천주교가 왜 성경 말씀을 삭제하고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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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2장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개역개정)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같이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킹제임스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이미 얻은 구원을 밖으로 드러내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는데, 개역개정 성경은 아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성취하라는 뉘앙스로 번역되어 있어서 자칫 행위구원으로 착각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보면 'work out your own salvation'으로 되어 있습니다. 'work out'이라는 단어는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뜻이죠. 즉, 이미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구원을 밖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으면 선한 행위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선한 행위 자체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구원 받은 이후에는 선한 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쁜 짓을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2장8절~10절)
이번에는 고린도전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9장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개역개정)
다만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킹제임스흠정역)
위의 성경구절은 성경사본과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앞뒤 문맥을 살펴야 하는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9장27절 말씀은 24절에서의 '경주'라는 단어와 '상을 받는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상을 받기 위해 잘 달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주를 하기 위해서는 '선수'로 등록돼야 합니다. 선수가 아닌 사람들은 경주에 참여할 수가 없죠. 즉, 경주자로서 참여한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27절에서 버림을 받는다는 뜻은 경주에 실패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실패는 구원을 상실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은 이미 가지고 있지만, 보상을 받지 못할까 싶어 걱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천국에서의 보상은 무슨 금은보화 따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화되는 삶을 걱정한 것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은 이미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문설주와 인방에 뿌린 어린양의 피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즉 이집트를 탈출한 자체가 구원입니다.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성화의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천사들의 음식인 만나를 먹었고 그들의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음식인 만나는 성도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예표하고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았던 것은 썩음이 없는 천국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경주자로서 잘 달려서 성화되는 삶을 살고자 했으나 혹시 육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되어 모세나 아론처럼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억제하여 하나님께 복종시킨다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바울 또한 여전히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내 지체들 속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출하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처럼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7장23절~25절)
사도 바울조차도 이렇게 계속해서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죄들로 인해서 구원을 잃는 게 아닙니다. 보상의 손실을 당하는 것이죠. 보상의 손실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왜 중요할까요? 지금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고린도후서5장10절)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부활 또는 휴거된 성도들이 심판을 받는 곳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심판석이죠. 따라서 성도들도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과 같은 영화로운 몸을 받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이란 영화로운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뜻합니다.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every one may receive the things done in his body.'라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의 영어는 킹제임스성경뿐만 아니라 현대역본도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주의 날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공중강림하시기 이전까지 이 세상을 살면서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한 보상과 보상의 손실을 합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받은 영화로운 몸 안에 적용시킨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영화로운 몸은 썩지 않는 몸입니다. 썩지 않는 몸이란 더 이상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그런 몸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물리적 공간을 통과할 수도 있으며,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도 있으며, 순식간에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 있는 그런 몸입니다. 그런데 이 외에도 다른 능력도 갖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능력은 각자가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했던 모든 일에 대한 보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몸이 죽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구약시대에 나답과 아비후가 주 하나님께 이상한 불을 드리다가 즉사한 경우가 있으며, 신약시대에 성령님을 속인 죄로 즉사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들을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이 세상에서의 육신은 죽게 되었으나 나답과 아비후는 낙원에 갔을 것이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몸만 죽었고 그들의 영과 혼은 하나님께서 계신 천국에 갔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고통 받지 않고 순식간에 죽어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저는 오히려 그들이 복 받은 사람들이라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로운 몸을 받을 때 이 세상에서 한 일에 따라서 각자가 다른 몸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성화되는 삶을 살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새로운 몸을 받을 때 기본적인 몸만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고린도전서3장14절~15절)
즉,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9장27절에서 느꼈던 버림당함에 대한 두려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모세나 아론처럼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여 보상의 손실을 당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기본적인 몸만 받을지라도 천국은 천국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저주가 없고(요한계시록22장3절), 사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요한계시록21장4절), 썩음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8장21절).
지금부터는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명백한 성경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16절)
위의 성경말씀을 논리적으로 잘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나와 있습니까? 멸망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믿음 이후로는 멸망으로부터 안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구절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써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영원토록 안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라.(히브리서10장13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요한복음 11장25절~26절)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느니라.(요한복음 6장47절)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되면 영원토록 안전하게 된다고 나와 있으며, 믿음 이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나와 있으며, 영존하는 생명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진실로 진실로 이렇게 거듭 강조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믿음 이후에는 영원한 안전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잃어버릴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게 구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동시에 우리의 영과 혼은 영원하며 영존하는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죠. (물론 몸도 나중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 또는 휴거되면서 썩지 않는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중간에서 잃어버릴 수 있다면 이미 구원이 아닙니다. '영원하다' 또는 '영존한다'라는 말과 '중간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서로 모순되는 말입니다. 만약 중간에서 끊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구원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로마서3장4절)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편116편11절)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점이 또 있습니다. 중간에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어떤 행위 때문에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악행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선행을 해야만 구원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조건이 믿음 + 행위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99퍼센트는 믿음이지만 1퍼센트는 사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구원상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행, 즉 나쁜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죠. 선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사람의 행위가 몇 퍼센트인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끼치는 한계를 정해주신 적이 있습니까? 1퍼센트인지 10퍼센트인지 50퍼센트인지 성경에 나와 있나요? 만약 1퍼센트가 허용된다면 100퍼센트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뭐라고 나와 있나요? 로마서11장6절을 보면 믿음과 행위는 섞일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그것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만일 그것이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로마서 11장6절)
믿음이면 믿음 행위면 행위 둘 중의 하나만 가능하지 믿음+행위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행위가 섞일 수 없다면 인간의 행위 100퍼센트로 구원에 이르던지 그게 아니면 믿음 100퍼센트로 구원에 이르던지 둘 중의 하나로만 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4장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보혈대속을 믿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그렇다면 행위 100퍼센트는 될 수 없음이 명확하지 않습니까? 결국 믿음 100퍼센트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로마서 3장28절)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얻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공짜로) 주셨다고 여러 차례(로마서3장24절, 고린도전서2장12절, 에베소서2장8절 등)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만으로 그 은혜를 감사하며 받으면 되는 겁니다.
구원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구원의 유지 또한 하나님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권능과 말씀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3장22절)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장6절)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수치를 멸시하시며 십자가를 견디셨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혀지셨느니라.(히브리서12장2절)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3장22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라디아서2장20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으니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민수기 23장19절)
이처럼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며 구원의 유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구원받은 후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 하나님께서 은혜로 99퍼센트를 해 주셨고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저의 행위 1퍼센트를 더해 구원을 유지했습니다.'라고 자랑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에베소서2장9절을 보면 구원에 대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고린도후서7장10절)
성경에 구원은 돌이킬 수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육신은 여전히 죄성을 지닌 아담의 피를 지녔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죄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없애주셨기 때문에 지옥에 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지옥에 갈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례가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5장을 보면 교회 내에 어떤 사람이 이방인들도 행하지 않는 극악한 음행을 저질렀는데,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도록 판단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5장5절)" 즉, 이토록 무지막지한 죄를 저질렀어도 벌을 받는 것은 육신의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뿐이며 그의 영은 주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주의 날에 부활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언하는 사례입니다.
다음 성경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로마서4장5절)" 여기서의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칭의, 즉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 그 믿음이 하나님께도 의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봉인하지 않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만, 자유의지만큼은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모든 인간의 미래를 다 알고 계십니다.
자유의지는 랜덤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자유의지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들어 있는 악한 마음 및 선한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양심과 이해력, 논리력, 판단력 등에 의해 영향을 주는 근본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각 개인의 자유의지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자유의지가 선한 쪽으로 발현되면 구원받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쪽이란 하나님 쪽이라 이해하시면 됩니다. 악한 쪽이란 당연히 마귀 쪽이죠. 또한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선하고 악한 마음, 양심, 이해력, 논리력, 판단력 등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법이나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구원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우선 국어를 잘 해야 합니다. 국어를 잘 한다는 것은 이해력과 논리력과 판단력이 좋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마다 이해력과 논리력과 판단력이 다 다를까요? 그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각 개인의 자유의지의 속성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각 개인의 자유의지가 악한 쪽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고 선한 쪽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의지가 선한 쪽으로 강하게 작용하는 사람들이 구원받게 될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직 미완성된 인간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다시 태어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최종 완성품이 된 진짜 인간들입니다.
김영현 전도사는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말하면서도 구원상실을 주장하는 여러 유명 개신교 교파가 모두 이단이 된다는 게 말이 되냐며 다수의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명한 목사와 권위 있는 성경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논리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인간입니다. 또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더라도 성경과 맞지 않으면 배격해야 합니다. 저 또한 오직 성경만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경을 보는지가 더 중요하며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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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상실교리 반박 - 01편, 히브리서 6장 4절~8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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