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거든 너와 함께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하라.(마태복음18장16절)
위의 성경구절을 보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시어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확증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19장15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다른 사람들의 시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있는 구절들과 함께 세세한 사건들이 서로 얽혀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거짓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이 추가로 기록한 요한복음까지 더하면 무려 4명의 증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1천 년 전에 기록된 십자가 예수님
그들이 약탈하며 울부짖는 사자같이 나를 향해 입을 벌렸나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고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심장은 밀초같이 되어 내장 한가운데서 녹았나이다. 내 힘은 질그릇 조각같이 말랐고 내 혀가 내 턱에 붙으며 또 주께서 나를 사망의 티끌 속으로 데려가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사악한 자들이 모여서 나를 둘러막으며 내 손과 발을 찔렀나이다.(시편22편13절~16절,킹흠마제스티)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된 십자가 예수님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 우리는 그를 피하려는 것 같이 우리의 얼굴을 감추었으며 그는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지만 우리는 그가 매를 맞고 하나님께 맞아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노라. 그러나 그는 우리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도다.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돌아섰는데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지우셨도다. 그는 압제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어도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도살장으로 향하는 어린양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 그는 감옥에도 가지 못하고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밝히 드러내리요? 이는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졌고 내 백성의 범법으로 인해 매를 맞았기 때문이라. 또 그는 자기 무덤이 사악한 자들과 함께 있도록 하였으며 죽어서는 부자와 함께하였으니 이는 그가 폭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속임수도 없었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그를 고통에 두셨으니 주께서 그의 혼을 죄로 인한 헌물로 삼으실 때에 그가 자기 씨를 보고 자기 날들을 길게 할 것이며 또 주의 기쁨이 그의 손에서 번창하리라. 그가 자기 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이는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위대한 자들과 나눌 몫을 나누어 줄 것이며 그가 강한 자들과 노략물을 나누리니 이는 그가 죽기까지 자기 혼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법자들을 위해 중보하였느니라.(이사야서53장3절~12절,킹흠마제스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된 이후에 악을 누르고 선을 추구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만약 인간이 완벽하게 악을 누를 수 있었으면 어쩌면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에 굴복하였습니다. 이제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위기에 빠진 인간을 구하시고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창세 이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베드로전서1장20절, 에베소서1장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예수님께서 죽기 하루 전에 겟세마네라는 곳에 들러 기도하러 들어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에 머물며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26장38절)" 겟세마네라는 단어는 원래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혼을 쥐어 짜내는 고통을 상징한다고 생각됩니다.
누가복음에 그러한 고통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더라.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분의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바닥에 떨어지더라.(누가복음22장43절~44절)" 천사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는 현상을 의학적으로 혈한증이라고 하는데,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뜻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뜻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장39절)"
위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 관계가 끊어지게 되는 그 순간을 두려워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맹렬한 진노의 저주, 즉 지옥형벌을 받으려면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인간의 죄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죄덩어리 그 자체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죄가 없는 아버지의 아들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죄덩어리가 되어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그 스트레스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길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기 때문이며 창세 이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약속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자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이 지은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모두 끌어 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순간 예수님은 죄 덩어리가 되셨고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인간 예수님에게 쏟아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린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의 고통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그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라.(마태복음27장46절)
위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단순히 인간적인 고통 때문에 절규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거죠. 시편 22편에도 동일한 구절이 있다는 이유입니다. 그런 해석들의 특징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시편22편 이외에 이사야서53장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예언으로 기록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구약성경의 곳곳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구절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성취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1천년 전의 성경 말씀을 예수님께서 입으로 반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증명할 뿐,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를 충분히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께서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규하시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들 하나님으로서의 외침이었다면, '나의 하나님이여'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여'라고 했을 겁니다. 우리 인간들도 삶이 고통스럽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라고 절규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인간의 몸으로 피 흘리시고 죽어야 합니다. 인간의 대표가 되셔서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지옥의 심판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전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약한 인간의 몸을 가진 진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고통을 느끼셨고 당연히 고통스러운 절규를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26장39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아들로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지만 마태복음27장46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의 형벌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9장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속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이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기록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복음19장28절)"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시편69편21절의 "그들이 또한 쓸개즙을 나의 먹을 것으로 주며 내가 목마를 때에 내게 식초를 주어 마시게 하였나이다."라는 성경 기록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만, 시편22편15절에 "내 힘이 질그릇 조각같이 마르고 내 혀가 내 턱에 붙나이다"라고 나와 있는 구절과도 상통합니다. 너무 목이 마른 상태를 표현한 구절이죠, 이런 목마름은 지옥에서도 존재합니다. 누가복음16장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부자는 너무도 목이 말라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시고 나사로를 보내사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매(누가복음16장24절)" 손가락 끝의 물 한 방울을 간절히 원할 정도의 목마름이 바로 지옥의 고통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도 갈증에 관한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6장35절)", "누구든지 내가 줄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줄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4장14절)" 물론 이 구절들은 영원하며 영존하는 생명, 즉 구원을 뜻하는 구절들입니다만, 더불어 이 구절들은 지옥의 정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육신을 입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해 한 번 고난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성령에 의해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3장18절)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5장2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이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라.(갈라디아서3장1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로마서8장3절)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향해 죽은 우리가 의를 향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베드로전서2장24절)
위의 성경구절들을 조합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하나님이시며, 우리 인간을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스스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 정죄를 받으셨고, 그로 인해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 때문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베드로전서2장24절에 나오는 ‘그분께서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나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서53장5절의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성경에 피 흘림이 없으면 사면이 없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9장22절).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1절에서5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성경기록대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큰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입장과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들의 시각에서도 십자가 형벌이 왜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째,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처벌을 원하는 수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데려가서 재판을 받게 했으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23장4절). 헤롯도 예수님이 무죄하다면서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고, 빌라도는 이번에도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누가복음23장14절, 누가복음23장22절). 빌라도는 총 3번에 걸쳐서 예수님께는 죄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빌라도 말고도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한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고(마태복음27장19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죄인들 중 오른쪽의 죄인도 예수님을 의로운 분이라 했으며(누가복음23장41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사들의 수장인 백부장도 예수님이 의로운 사람이라 증언했습니다(누가복음23장47절).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팔아넘긴 유다조차도 예수님은 무죄하고 오히려 유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고백했습니다(마태복음27장4절). 또한 빌라도는 유대인 군중들에게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준 후에 손을 씻으면서 자기는 의로운 예수님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마태복음27장24절).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죄목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또한 여기(이 세상)에서 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하셨으며 다만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18장36절~37절).
참고로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을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원래 구약성경의 유대인 율법에 따르면 신성모독의 죄인은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레위기24장16절).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죽으셔야만 합니다. 성경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 기록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의 사함이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며, 성경기록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신명기21장23절, 시편22편16절, 히브리서9장22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게 했던 일은 사람이 한 일처럼 보입니다만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사도행전2장23절).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에도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히브리서4장15절),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셨으며(베드로전서2장22절)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이었을 겁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십자가 형벌을 받아 죽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예수님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예수님만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인이었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과는 다르죠. 물론 억울하게 십자가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로마서3장10절)", 또한 예레미아서를 보면 인간의 마음은 극도로 사악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예레미아서17장9절)".
둘 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가장 강력한 분노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쏟아부으셨습니다.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담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야말로 최악의 죄덩어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 그 징벌이 얼마나 가혹했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실 때의 그 불편한 시선 또는 외면의 시선 하나만으로도 예수님께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셋 째, 예수님께서는 온갖 조롱을 받으셨으며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는 유대 백성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이 끝난 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놀리면서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주홍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오른 손에 갈대를 쥐어 주며 갖은 말로 비웃고 침을 뱉고 경배하는 시늉을 하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면서 조롱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놀린 후에는 다시 주홍색 옷을 벗겨서 예수님의 옷을 입힌 후 끌고 갔습니다.
넷 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형장으로 끌려가시는 동안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로마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가시나무로 만든 가시관을 씌웠는데, 이스라엘 지역의 가시나무에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가시관을 푹 눌러 씌우는 순간 독이 예수님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서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사야서52장에 가시나무 독 때문에 고통 받으신 예수님의 얼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더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너를 보고 심히 놀랐느니라.(이사야서52장14절)"
또한 채찍에 맞아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당시 형벌에 사용하던 채찍에는 날카로운 뼈와 쇳조각들이 달려 있어서 단 한 번의 재찍질만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안길 수 있었습니다. 피부와 근육이 찢어지고 혈관이 파열되는 것은 물론이었으며 심하면 뼈가 드러나고 내장이 탈출되기도 합니다. 출혈로 인해서 채찍질만으로도 사망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째,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몸무게로 인해서 뼈들이 뒤틀리고 신경들을 압박하게 됩니다. 거의 모든 신경 세포들이 고통의 신호를 뇌로 전달합니다. 제가 예전에 책상에 앉는 자세의 문제로 인해서 목 뒷부분과 척추가 아파서 마취통증의학과와 신경외과에서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처방전을 받아 약을 복용하면서 물리치료를 병행하기를 수년간 했습니다.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약간의 자세 문제로도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거의 모든 신경이 압박되는 고통은 어떠했겠습니까.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고통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런 고통에 대해서 시편22편에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섯 째, 예수님께서는 숨을 쉬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양 팔이 고정되어 있어서 상체의 몸무게 때문에 가슴이 앞으로 쏠려 횡경막이 활처럼 늘어나서 강제로 숨을 들이쉬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숨을 내쉬어야 하는데, 숨을 내쉬기 위해서는 못 박힌 손목과 발목에 힘을 줘서 상체를 들어 올려야만 합니다. 손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힌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극심한(고통)’이라는 단어 ‘excurciating’의 유래가 십자가형벌로부터였다고 합니다. 숨을 내쉬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 손목과 발목에 힘을 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일곱 째, 시편22편15장과 누가복음16장24절에서 지옥에 간 부자가 느낀 극심한 갈증을 예수님께서도 느꼈습니다. 인간은 출혈이 심해지면 갈증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전부터 이미 채찍을 맞아 출혈이 심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을 때 발목과 팔목에서도 계속 출혈이 있었기 때문에 극도의 갈증을 느꼈을 겁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고통과 더불어 갈증의 고통은 두 경우 모두 생사의 기로에 있는 고통이라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고통이리라 짐작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9장28절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뜻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단순히 목마름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든 일을 이루신 후 성경기록을 성취하기 위한 말씀이셨습니다.(시편69편21절 참조)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겪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인간의 시각으로 추측했을 뿐, 사실 미천한 우리 인간들이 어찌 예수님의 고통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담 이후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스스로 죄덩어리가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맹렬한 분노와 지옥의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싹 다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인간들에게 영원하며 영존하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대가(랜섬)의 고통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 이후 크게 두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 인간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하신 일, 즉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만 믿으면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어린양입니다.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한복음1장29절)
다른 하나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개인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마태복음27장51절)", 십자가 사건 이후로 이제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건물 성전은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크리스천 성도들 각자의 몸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몸 자체가 성전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3장16절)"
여기서 중요한 점 한 가지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은 단번속죄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서10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이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지만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할 수 없으나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한 번 헌물을 드림으로써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라.(히브리서10장10절~14절)"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의 희생물, 즉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 희생물로 하나님께 드려서 크리스천 성도들을 영원토록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참고로 천주교 성경의 근간이 된 바티칸 사본에는 히브리서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여전히 제사장(사제들)이 존재하고, 미사라는 제사의식을 통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단번속죄 사역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를 믿으면 구원받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천주교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천주교와 천주교의 구원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아래의 천주교의 실체라는 시리즈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s://smallstars7.tistory.com/55
https://smallstars7.tistory.com/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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