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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지구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정체

코페르니쿠스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6세기는 영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에라스무스(에라스뮈스)가 진리의 신약 성경본문을 만들었던 때가 1516년이었으며, 이로 인해 깨어난 성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발생한 시기가 1517년이었습니다.

 

위의 두 가지의 사건이 좋은 쪽의 사건들이었다면, 1540년 로욜라에 의해 예수회가 창설된 사건과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1543년 초판발행≫가 출판된 사건은 나쁜 쪽의 사건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우주와 둥근 지구라는 마귀의 이론을 퍼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코페르니쿠스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 전에 우선 아래 링크를 클릭하셔서 카톨릭 시스템의 전반적인 이해와 16세기 유럽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보신 후에 이 글을 읽으시면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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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폴란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계였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무위키 등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부모가 부유한 상인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으나 정치적인 입지도 상당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코페르니쿠스 시니어가 토룬시의 시의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바르바라는 토룬의 유명한 귀족가문인 바첸로데 집안 출신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토룬시의 시의원이었습니다. 바첸로데 가문은 프로이센 귀족들과 혼인을 맺고 있는 막강한 집안이었습니다.

 

당시 바첸로데 가문은 유럽의 카톨릭 조직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의 외삼촌이 카톨릭 주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형제자매들도 한 명을 빼고 모두 카톨릭에 몸을 담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형 안드레아스는 귀족으로 봉급을 받는 카톨릭 사제직인 참사회원이 되었으며, 그의 누나 바르바라(어머니의 이름과 동일) 또한 베네딕토회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년에 수녀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누나 카타리나는 토룬시의 시의원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10살 때 아버지가 죽자(어머니는 1490년대 중반에 죽었다고 함) 외삼촌인 카톨릭 주교 루카스 바첸로데 밑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그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루카스는 바르미아의 대주교로 승진했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코페르니쿠스는 자신도 신부가 되기 위해서 크라쿠프 대학교(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거기서 천문학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1495년 크라쿠프 대학을 떠나 외삼촌 루카스에게 갔는데 루카스 바첸로데는 대주교의 지위를 이용해서 당시 공석이었던 바르미아 성직자 자리에 코페르니쿠스를 앉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임명이 지연되어 2년 후인 1497년에 바르미아의 성직자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는 추가로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 성당의 명예직을 수여받았으며 1508년에는 교황의 특별허가를 받아서 추가성직을 받기도 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정식으로 사제로 서품되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일부에서는 서품되었다고도 하고 서품되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당시의 코페르니쿠스는 집안의 배경만으로도 사제로 서품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사실도 사제 서품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제가 왜 코페르니쿠스의 카톨릭 성직자 경력을 나열하는가 하면, 그의 배경이 골수 카톨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오직 카톨릭만 허용되던 중세시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그 집안 전체가 카톨릭 시스템에 묶여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특히 그를 보살펴주었던 외삼촌이 대주교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는 코페르니쿠스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을 당시의 카톨릭 분위기를 살펴볼 겁니다.

 

그 전에 우선 또 다른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지동설을 공표했을 때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저서로부터 89년 후인 1632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는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을 출판한 죄로 카톨릭 교회의 단죄를 받아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종신 징역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당시 갈릴레오의 죄목은 이단혐의였다고 합니다. 지동설이 이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정작 코페르니쿠스는 카톨릭으로부터 아무런 종교재판도 받지 않았고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카톨릭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으며 그의 책이 빨리 출판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이단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책의 내용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웃음을 사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출판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티에데만 기에세(Tiedemann Giese) 주교와 니콜라우스 폰 생베르크(Nikolaus von Schonberg) 추기경 등, 카톨릭계에서 오히려 출판을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그가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고스란히 적혀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코페르니쿠스 시절의 종교재판은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카톨릭 교리의 정통성을 강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동설은 무조건 배격해야만 했지만, 놀랍게도 카톨릭이 오히려 지동설을 퍼뜨렸던 것입니다. 갈릴레이에게는 종신 징역형을 선고했던 카톨릭이 어째서 코페르니쿠스에게는 상을 주었단 말입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카톨릭이 마귀의 체제라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카톨릭은 성경을 부정하는 일이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놈들입니다. 애초에 성경을 금서로 만들었던 놈들이 바로 카톨릭이었습니다. 지금도 천주교 카톨릭은 수많은 구절들이 삭제되고 추가되고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갈릴레이의 경우에도 속임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종신 징역형이라는 것은 눈속임일 뿐이고 실제로는 즉시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조금 자유롭지 않을 뿐이지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면서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메디치 저택과 시에나 대주교의 자택 등에 머물기도 했고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 별장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건강의 이유로는 피렌체 시내로 외출이 허용되었으며, 인근 수녀원의 딸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어찌 연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재판은 악명이 높기로 유명합니다. 일단 이단으로 지정되면 대부분은 끔직한 고문을 받다가 화형에 처해지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여기서 당시의 고문 방법들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이단으로 지정된 갈릴레이가 아무런 고문도 받지 않고 가택연금 수준에 그쳤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시 갈릴레이의 종교재판 자체가 보여주기 식 쇼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톨릭 사제들 중에 천문학자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특히 예수회 소속 인물들이 대다수입니다. 이들은 예수회 특유의 영성수련 과정을 통해서 마귀를 영접하고 성경을 부정하기 위해서 길러진 인물들입니다. 예수회 신부들은 16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에 파견되어 우주와 둥근지구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중국에까지 가서 둥근지구와 지동설을 퍼뜨렸습니다. 그는 지동설에 근거한 천문학과 천체관측기구 등을 중국 왕실에 전했고 둥근지구를 나타내는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천문학계에서 예수회 사제들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나 하면 유럽 천문대 운영의 약 25퍼센트가 예수회에 의해 운영되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대했습니다. 예수회는 유럽 전역에 100여개가 넘는 대학을 설립하여 천문학을 가르쳤습니다. 카톨릭에서 이렇게까지 천문학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지동설을 근간으로 하는 우주와 둥근지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초의 빅뱅 이론도 카톨릭 사제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황당한 이론은 벨기에의 조르주 르메트르(1894-1966) 신부가 1927년에 제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는 카톨릭 신부이면서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였습니다. 그는 벨기에의 예수회 중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론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교과서에까지 실려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 아이작 뉴턴(1643-1727),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 스티븐 호킹(1942-2018) 등은 중력이라는 인류 최대의 거짓말과 우주와 둥근지구의 이론을 만들어낸 거짓말쟁이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인물들이죠. 이들은 예수회와 딥스테이트가 물밑에서 띄워준 인물들로서 허점투성이의 이론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단한 이론인양 포장되어 있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고정관념이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코페르니쿠스를 띄워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이런 말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칸트는 우주를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인물이며 우주 어딘가에 외계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도덕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격하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천국과 지옥의 경우에도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았을 뿐 실존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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