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크리스천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여러 가지 욕구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식욕, 성욕, 수면욕, 배설욕 등의 욕구는 본능적인 것으로서 이성적인 제어가 힘듭니다. 물론 성욕의 경우에는 일정부분 제어가 가능합니다만,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정까지 제어하기는 쉽지 않죠. 그래서 과연 성경에서는 인간의 성욕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참고할 성경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입니다. 성경에 적혀 있는 간음, 음행, 음란 등의 단어가 주는 뉘앙스 때문에 많은 크리스천 성도들이 성적인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합쳐서 간음은 총 53건, 음행은 총 63건, 음란은 총 4건이 검색됩니다. 간음이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배신하고 다른 사람과 동침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음행이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이성과 섹스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둘은 모두 침실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명백한 죄입니다(로마서13장13절). 구약성경에서의 음행은 간음과 동일한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제 음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12장39절,16장4절, 마가복음8장38절에 나오는 음란은 영어성경에서 간음과 동일한 단어인 adulterous를 사용했는데 음란한 세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만 에스겔16장30절에서의 음란은 adulterous가 아니라 창녀를 뜻하는 whorish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도 앞의 문장 28절과 29절을 참고하면 하나님을 배신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간음, 음행, 음란 등은 대부분 이방신을 섬기거나 우상숭배를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대부분 그러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음행은 조금 다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음행은 음녀(바빌론음녀)와의 음행을 뜻하는데 이는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음행은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고린도전서6장18절)을 뜻하는 경우로도 많이 쓰였습니다. 고린도전서5장1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이방인들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음행이라고 하였으며, 마태복음에는 누구든지 음행이 아닌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나와 있습니다(마태복음5장32절,19장9절). 히브리서에는 음행은 잠자리를 더럽히는 짓이라고 나와 있으며(히브리서13장4절), 유다서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낯선 육체, 즉 천사와 성행위를 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일컬어 음행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유다서1장7절).
고린도전서10장8절을 보면 어떤 자들이 음행하다가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다고 나와 있는데, 이 구절은 민수기25장의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팀에 머물 때 모압의 딸들과 육체적인 음행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는 섹스행위 자체 때문에 죽었다 보다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 여인들과 음행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들이 다른 신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시험을 허락하시는데(13절), 그 시련을 이겨내고 우상숭배를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하신 것들, 즉 음행하다 쓰러지고(8절) 그리스도를 시험하다 뱀들에게 멸망당하고(9절) 불평하다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당하고(10절) 하는 것들은 구원받아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저지른 죄들이며 우리를 위해 본보기가 되었던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나의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를 피하라.(고린도전서10장14절)" 20절과 21절의 말씀도 마귀와 교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신약성경에 나오는 음행은 부적절한 육체적 성행위를 하려고 시도하거나 혹은 실제로 저지른 경우, 혹은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 이렇게 두 가지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간음, 음행, 음란 이외에도 정욕과 색욕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정욕은 영어성경에 대부분 lust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 단어가 오늘날에는 성욕을 뜻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원래는 인간의 모든 욕망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정욕(디도서2장12절)', '여러 가지 정욕(디도서3장3절)', '마음의 정욕(로마서1장24절)', '육신의 정욕(로마서13장14절)', '너희 지체 속에서 싸우는 너희의 정욕들(야고보서4장1절)', '이전 정욕들(베드로전서1장14절)', '사람들의 정욕(베드로전서4장2절)',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베드로후서1장4절)', '자기 정욕대로 걷는 자들(유다서1장16절)' 등의 앞뒤 구절을 참조하면 정욕이란 범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며 죄성을 지닌 아담의 피를 지닌 인간의 태생적 한계를 뜻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단어는 색욕입니다. 색욕은 신약성경에 총 6번 나옵니다. 영어성경에 lasciviousness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 일반 영어 사전에는 음탕하고 선정적이라는 뜻으로 나와 있으며,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마제스티 에디션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 성경사전과 킵바이블닷컴의 성경사전에는 색욕(lasciviousness)을 '합당치 못한 성욕'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영어사전으로 본다면 남성이 여성을 보고 또는 여성이 남성을 보고 성욕을 느낀다든지 혹은 야한 상상을 한다든지 혹은 포르노 영상과 같은 것을 보고 자위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것들이 성경사전의 합당치 못한 성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살펴 볼 유다서를 보면 색욕은 불신의 행위이며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동성애와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색욕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마가복음7장21절~23절). 마가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보면 색욕은 죄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7장 전체를 살펴봐야 합니다. (마가복음7장 관련 내용은 조금 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색욕과 성욕은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성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넣어주신 본능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능인 성욕 자체를 없앨 수 있을까요? 물론 성욕을 자제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금욕주의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요? 인류의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오히려 금욕주의는 하나님을 대적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사탄의 최대 걸작이라 일컬은 천주교가 바로 대표적인 금욕주의 종교입니다. 카톨릭 사제들과 수녀들은 성욕을 억제하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갑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죠. 오늘날 변개된 카톨릭 성경이 만들어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3세기 초의 기독교 교부 오리겐(오리게네스)도 철저한 금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거세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금욕은 어찌 보면 자기 자랑입니다. '내가 이만큼 금욕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 이런 나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의 행위를 가지고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죠. 저는 이성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감정과 스스로 욕구를 해결하는 자위행위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넣어주신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본능이 없다면 어떻게 인류가 번창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후 인간에게 말씀하신 첫 번째 명령이 다산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창세기1장28절). 참고로 성경에는 자위나 수음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위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나 문장도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성경에 이와 관련된 구절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유다서를 보면 색욕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내가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가 생겼나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들어온 어떤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그들은 이 정죄를 받도록 옛적부터 미리 정해진 자들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니라.(유다서1장3절~4절)
즉, 색욕을 행하는 자들은 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성도들 중에 야한 영상을 보거나 음란한 상상을 하거나 자위행위를 한다고 해서 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글의 문맥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들어온 어떤 사람들이며 정죄를 받도록 옛적부터 미리 정해진 자들이라는 것이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행위라는 뜻입니다.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베드로전서1장2절).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과는 다릅니다. 은혜를 어떻게 색욕거리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에베소서2장8절). 그러나 불신자들은 은혜를 거절하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 즉 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7절의 소돔과 고모라에서 낯선 육체를 따라간 행위, 그것이 바로 은혜를 색욕거리를 바꾼 짓이라는 것이죠. 그로 인해서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서 1장4절의 색욕은 불신의 행위로 봐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한창 성욕이 왕성할 때에는 이성을 보고 성적인 호감을 가지게 되며 성적인 상상을 하게 되고 자위행위를 하게 됩니다. 누구라도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남자들은 몽정을 통해서라도 배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생리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러한 행위들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삼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율법은 딱 두 가지의 명령에 매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죠(마태복음22장37절~40절). 즉, 하나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하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음란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을 슬프게 하거나 배우자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명령을 어기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과도한 성욕은 탐욕이고 탐욕은 우상숭배라 하였기 때문에(에베소서5장5절) 성욕은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면 주 하나님 아버지께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과도한 성욕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다 앞에 두는 것들은 모두 탐욕입니다. 심지어 취미생활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을 앞서는 것들은 탐욕이며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마가복음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가복음7장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7장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들이 담겨 있으며 1절부터 23절까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같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과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들의 위선을 들춰내시고 꾸짖고는, 인간의 속성 자체가 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각 사람은 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깨달으라. 사람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어떤 것도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니라.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그분께서 사람들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 비유에 관하여 그분께 여쭈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그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음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것은 그의 마음속이 아니라 뱃속으로 들어가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뒷간으로 나가느니라, 하시니라.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는데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7장14절~23절)
위의 문장을 보면 알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두 번 반복해서 하고 계십니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지만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두 번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두 번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귀가 있는 사람들은 들으라고도 하십니다. 두 번째 말씀하실 때에는 더러운 것들의 실체가 이런 것들이라고 예를 들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들어주신 예들 중에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것들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만으로도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악한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탐욕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리석은 생각이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여자를 보고 마음 속으로 욕정을 품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5장28절). 물론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교회시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들 중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속성 자체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다고 나와 있습니다(예레미아서17장9절). 인간의 마음이 어쩌다 한 번씩 악할까요? 아닙니다. 악하면 항상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절대로 스스로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라고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피로 그 죄들을 깨끗하게 없애주신 것입니다. 너희 인간 스스로의 의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으니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에베소서2장8절). 즉,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보혈대속을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이죠.
갈라디아서5장19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과연 구원상실을 뜻하는 것일까?
성도님들이 가장 궁금해 하시는 성경구절은 아래 갈라디아서 말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색욕 등으로 인해서 구원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며 그것들은 이것들이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시기심의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런 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갈라디아서5장19절~21절)
이 부분을 설명해 드리기 전에 우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아래 포스팅글을 먼저 읽고 오시면 좋습니다.
https://smallstars7.tistory.com/34
갈라디아서도 저 문장만 떼어 놓고 보면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5장은 할례를 받는 행위로 스스로 속박에 놓이려는 자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자들, 즉 구원 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 내에 아직도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이렇게 설득하는 것은 너희를 부르시는 분에게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하느니라. 나는 주를 통해 너희에 대하여 확신하되 너희가 조금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아니할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는 자기의 심판을 담당하리라.(갈라디아서5장7절~10절)
여기서 너희는 갈라디아 교회 내의 구원받은 성도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잘 달리고 있었는데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만드는 훼방꾼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훼방꾼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누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악한 것으로 나옵니다. 부패하고 썩는 것을 의미하죠.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는 반면 성도들을 어지럽히는,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이 아닌 성도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사도 바울은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아예 잘려나가기를 원하노라.(갈라디아서5장12절)" 교회 내에서 성도들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은 아예 갈라디아 교회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이 구절을 보면서 꼭 유대인들만 성도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누구든지 교회 내에서 자기 자신의 의, 즉 율법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회 내의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과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며 구원받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죠.
이어서 13절~14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유를 육신의 욕심을 위해서 쓰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서로 물고 삼킨다면 너희가 서로에 의해 소멸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갈라디아서5장15절)" 라는 경고로 율법주의자들과 크리스천 성도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논쟁과 혼란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6절~17절에서 성령에 따라 걸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해를 해야 갈라디아서5장21절의 하나님의 왕국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다시 갈라디아서5장19절~2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한편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며 그것들은 이것들이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시기심의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런 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갈라디아서5장19절~21절)
이제 이해가 되시나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냐는 것이죠. 할례니 뭐니 하는 유대인의 전통과 율법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그들은 육신의 행위를 하는 자들이며, 육신의 행위는 원래 더러운 것들이라고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전통도 결국은 육신의 행위의 일부라는 것이죠. 율법에 의해 구원을 이루려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갈라디아서5장21절의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는 자들이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의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6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6장에도 육신의 본성에 따른 삶을 살고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비슷한 예들이 나와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얼마쯤 있었으나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기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다고 인정받았느니라.(고린도전서6장11절)"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들 가운데에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색욕 등의 죄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내용으로 판단하면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대속을 진심으로 믿어서 다시 태어나면 무조건 구원받습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히 내주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우리의 죄들과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브리서8장12절).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인간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자체가 교만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 안에만 있으면 됩니다. 성경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고민하지 마시고 항상 명백한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성경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수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색욕만 죄가 되는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5장에는 색욕뿐만 아니라 시기심, 증오, 불화, 진노, 다툼 등의 죄목도 나옵니다. 이런 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야고보서를 보면 모든 율법 중에서 단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에서 죄가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야고보서2장10절)" 따라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윗의 스토리를 기억하시나요? 다윗은 남의 아내를 탐하여 간음하였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함정에 빠뜨려 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구원받았습니다.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선택하실 때 이미 그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윗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아담의 피를 지닌 인간입니다. 제가 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인간이 구원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며 인간 스스로는 죄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을 요약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기 전까지 600개가 넘는 율법들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이후 자기가 그동안 지켜왔던 율법들을 단지 똥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금욕 등을 포함한 율법의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율법은 단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는 용도라고 나와 있습니다(로마서3장20절,갈라디아서2장16절). 율법의 행위로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저주 아래에 있다고도 했습니다(갈라디아서3장10절). 모든 율법은 이미 예수님께서 끝마침을 이루셨습니다(로마서10장4절). 따라서 결론은 믿음뿐입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론을 내리노니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니라(로마서3장28절)". 인간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게 되며(에베소서2장8절), 구원받은 사람들에게서는 선한 행위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육신은 여전히 죄성을 지닌 아담의 피를 지녔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죄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없애주셨기 때문에 지옥에 갈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지옥에 갈 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례가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전서5장을 보면 교회 내에 어떤 사람이 이방인들도 행하지 않는 극악한 음행을 저질렀는데,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도록 판단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5장5절)" 즉, 이토록 무지막지한 죄를 저질렀어도 벌을 받는 것은 육신의 죽음, 즉 이 세상에서의 죽음뿐이며 그의 영은 주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지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주의 날에 부활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언하는 사례입니다.
다음 성경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로마서4장5절)" 여기서의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행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칭의, 즉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향한 믿음, 그 믿음이 하나님께도 의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는 주체는 우리의 혼과 영입니다. 몸이 아닙니다. 물론 몸도 나중에 부활 또는 휴거될 때 구원받습니다만, 그 전까지는 참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가 짓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로마서7장17절). 구약성경에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이외에도 민수기, 신명기 등 여러 책들이 있습니다. 창조의 진리와 구원의 진리만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면 창세기와 출애굽기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민수기, 신명기 등의 책들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아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전히 아담의 피를 지닌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죄를 지으라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가 믿었으니까 안심하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가장 큰 명령을 지킨 것이니까요.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태연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이 세상에서의 징계를 뜻함)를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왜냐하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12장8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도 죄의 종이 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로마서6장15절~16절). 다만 여기서의 사망은 구원을 잃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육신의 사망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작은 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큰 죄를 뜻합니다(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참조).
이제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성령에 따라 걷는 것, 즉 성화의 삶을 사는 것으로서 성욕을 절제하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앞서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를 보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의 육적인 본성에 따른 많은 여러 가지 악행들을 수시로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악하면 항상 악한 것이지 어쩌다 한 번 악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침례를 받아서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성령님께서 영원히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육신의 본성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육신의 본성이 악한 생각이나 악한 행위를 하고자 하면 망설이게 되고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만약 악한 일을 하게 되면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속성을 지녔고 극도로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예레미아서17장9절)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만약 색욕과 같은 과도한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괴롭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진심으로 기도를 드려 보세요. 그러면 아버지께서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죄로 인해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함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되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로마서8장3절~6절)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서 65장17절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한다는 것의 의미 (0) | 2024.01.12 |
---|---|
천주교의 실체 - 06편, 미사, 즉 성체성사와 화체설의 거짓교리 (1) | 2024.01.07 |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과 크리스천 성도 (0) | 2023.11.15 |
극단적 세대주의 비판 : 야고보서는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0) | 2023.11.11 |
천주교의 실체 - 05편, 잘못된 카톨릭의 구원교리 (0) | 2023.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