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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극단적 세대주의 비판 : 야고보서는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기도 (출처: Pixabay)

 

아직도 상당히 많은 지역교회에서 행위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상관없이 구원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교회시대에도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믿는 것은 명백히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 구원방식이 다르다고 믿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을 극단적인 세대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교회시대에만 해당되고, 구약시대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난기에는 믿음+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신약의 경우에도 야고보서와 히브리서는 믿음+행위구원이 담겨 있는 책이며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2장8절~9절)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인정받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느니라.(갈라디아서2장16절)

 

율법에서 난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립보서3장9절)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결론을 내리노라(로마서3장28절)

 

위의 성경말씀들을 보면 분명히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확증해주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모두 거짓입니다. 교회시대에도 행위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위의 성경구절들만으로도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극단적 세대주의가 왜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이사야서64장6절)

 

위 구약성경구절에서 보다시피 사람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의 행위는 싹 다 누더기라는 것이죠.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A라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쥐새끼를 한 마리 물어다가 A가 식사하고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과연 A는 그 쥐의 사체를 기쁘게 받을 수 있을까요? 인간과 고양이의 간격이 이렇게 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인간과 고양이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거의 무한대입니다.

 

극단적 세대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행위구원을 강조하기 위해 주로 인용하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사건은 크게 노아의 방주 사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사건, 그리고 창녀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을 돕던 사건 등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노아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만으로 부족하고 실제로 방주를 만드는 행위를 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죠.

 

야고보서에 이런 논리를 두둔하는 것 같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그것은 잘하는 일이니라.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는 바와 같이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였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전가되었느니라, 하고 말하는 성경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인정받고 믿음만으로 인정받지 아니하느니라.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사자(使者)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른 길로 보냈을 때에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기 아니하였느냐?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그렇게 행위 없는 믿음도 죽었느니라. (야고보서2장14절~26절)

 

위의 구절들은 행위구원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명한 야고보서 2장 말씀들입니다.

 

잠시 후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위의 성경말씀은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선한 행위, 즉 믿음의 행위가 나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행위를 해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를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2장8절~10절)

 

위의 말씀처럼 일단 구원을 받으면 선한 행위 가운데서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뜻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도 'faith without works is dead'라고 나와 있습니다. 믿음이 죽게 될 것(will be dead)이 아니라, 죽어있는 상태(is dead)인 것입니다. 가짜 믿음, 즉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것이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의 선한 행위는 인간 기준의 선이 아닙니다. 믿음 그 자체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구절은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아무개가 김아무개에게 말하길, '당신이 내게 말하길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당신에게서는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와야 할 행위가 하나도 안 보인다. 솔직히 나는 당신이 구원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행위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증명하고 있듯이 당신도 당신의 행위로 내게 증명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출처: Pixabay)

 

위의 성경구절을 아브라함의 사건에 적용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믿음을 통해, 즉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만, 인간끼리도 믿음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전가되었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행위가 있나요? 아브라함의 행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만 보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그것을 의로 인정받았듯이,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사람들에게도 아브라함의 의를 보였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오를 때에는 여러 청년들이 있었습니다(창세기22장3절). 아브라함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죠.

 

참고로 저는 선한 행위라는 것도 믿음을 유지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더 알려고 노력한다든지 항상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한다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든지 성경을 읽는다든지 성경강해를 듣는다든지 경건서적을 읽는다든지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께서 창조한 진짜 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든지 등등의 일들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행위를 해야만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그런 행위들이 나오는 겁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옛사람과는 다르다는 거죠. 예를 들어 구원받기 이전에는 진화론을 믿었던 사람이 진화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진화론자를 설득하려 한다거나, 구원받기 이전에는 이스라엘에 부정적이었던 시각을 가졌었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응원하게 되는 것 등이 있을 겁니다. 물론 남을 돕는 행위도 선한 행위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행동은 불신자들도 하는 겁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행위가 인간의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을 돕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고 하셨고 특별히 그 당시 가장 취약한 계층이었던 과부와 고아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어떤 사람이 내게 도움을 청했는데 내가 도움을 줄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지체가 된 사람이라면 반드시 긍휼의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스토리를 알고 계실 겁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행위들은 구원과 믿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행위의 핵심은 믿음 가운데서 걷는 일입니다. 위의 야고보서에 나오는 라합과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세요. 라합은 자기 나라를 배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한 행위로 보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천주교나 불교 신자들도 합니다. 그런 일에 관한한 어찌 보면 오히려 그들이 크리스천 성도들 보다 더 열심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이유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과 믿음의 유지 또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과 권능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3장22절,빌립보서1장6절,갈라디아서2장20절).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6장13절,17절). 노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죽일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이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믿음 따로 행위 따로 라는 것이죠. 과연 그럴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는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믿은 겁니까? 이건 믿지 않은 것입니다. 믿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방주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번에는 창녀 라합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람들을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 주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주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너희의 공포가 우리를 덮쳤으므로 이 땅의 모든 거주민들이 너희로 인해 기력을 잃었나니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르단 저쪽에 있던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진멸한 일을 우리가 들었노라. 우리가 이 일들을 들은 뒤에 곧바로 우리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인해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지 아니하였나니 주 너희 하나님 즉 그분은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여호수아기2장9절~11절)

 

라합은 하나님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대적하면 죽으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믿은 이후 자연스럽게 행위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정탐꾼들을 살려줘야만 자기와 자기 가족도 살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만약 그들을 죽게 놔둔다면 그건 라합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 짓을 해도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하는 생각이죠.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정탐꾼들을 반드시 살려줘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Fallen Angel(출처: Pixabay)

 

이제 마귀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그것은 잘하는 일이니라.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야고보서2장19절)" 이 구절은 개인적으로 조금 난해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고 떤다니?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루시퍼가 사탄마귀가 된 큰 사건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는가!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내가 또한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너는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들로 끌려 내려가리라.(이사야서14장12절~15절)

 

위는 루시퍼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는 원인이 나와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에스겔서28장을 보면 루시퍼는 지혜가 충만하고 아름다움이 완전하였으며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퀄리티를 가진 존재였을 겁니다.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창조물이 교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보다도 더 높아지려고 하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루시퍼는 하나님을 믿은 것일까요? 믿지 않은 것일까요? 물론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이시며 전지전능한 분이라는 사실은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죠. 만약 루시퍼가 하나님을 믿었다면 자신의 쿠데타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루시퍼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고 그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질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야고보서2장19절을 20절과 함께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그것은 잘하는 일이니라.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야고보서2장19절~20절)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라는 말씀 뒤에 '그러나'가 나옵니다. '그러나'는 앞 문장과 관련이 있는 접속사입니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 부사죠. 마귀들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으나 믿음으로 인해서 나오는 행위가 없으니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수차례 말씀드렸다시피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즉,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입니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파워를 알고 있어서 떨긴 하지만 자기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귀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여 부활 또는 휴거 받아서 영원하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17장3절)"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이분들이 어떤 분들인지는 모르고 있거나 혹은 믿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난기 성도들의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환난기 성도들은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믿은 이후에는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고 해도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행위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환난기의 성도들도 제가 위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으면 지옥에 갑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짐승의 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짐승의 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받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믿음, 즉 처음부터 믿지 않은 것입니다. 혹은 믿었다고 착각했던 것이겠죠.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거짓된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속으로는 믿지 않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짐승의 표를 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보고 어떻게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마귀에게 사로잡힌 어떤 소녀가 바울 일행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사도행전16장17절)" 여기에 틀린 말이 있습니까? 이처럼 마귀 들린 사람도 옳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이 그냥 세상에서의 음모론에 의지해서 짐승의 표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그리고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계속 거부하고 있는데 가족들 중의 누군가가 수면제를 먹여서 강제로 짐승의 표를 받게 했을 경우, 이 사람도 지옥에 가야 할까요? 이건 하나님의 뜻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 받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99퍼센트를 도와주셨고 내가 나의 행위 1퍼센트를 더해서 구원을 완성했습니다. 라고 자기 자랑을 한다는 게 상상이 되십니까?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100퍼센트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들어간다면 오염된 구원이 됩니다. 오염된 구원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행위구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더러운 누더기와도 같습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행위구원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아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서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라디아서2장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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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우선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하며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원히 하나님 곁에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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